다이소 의도하지 않은 만원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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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의 사회  다이소는 왜 비난의 중심의 되었나  어느 기사로부터 촉발된  다이소의 만원 인상 계획.  다이소에 자주 가는 사람이라면 다이소에서 가장 비싼 물건dl 오천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 역시 다이소를 자주 가고 온라인 몰에서도 가끔 물건을 사는 편인데 오천원이 제일 비싸다 보니 무료 배송의 기준인 3만원을 채우는 게 참 버거울 때가 많다. 게다가 다이소의 제품은 거의 다 천 원 정도여서 무료 배송 기준 채우다가 포기하고 집근처 다이소에서 구입한 적도 있을 정도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다이소에서 가격이 조금 나가는 제품도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 중 하나다. 만원 이나 7천원 그리고 8천원에 해당하는 물건이 나온다고 해도 분명히 다이소답게 품질과 가성비까지 챙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만원이 최고 가격으로 책정이 된다면 본격적인 가구같은 고가 제품도 생각보다 많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화장품은 모르겠으나 의류 제품은 분명 만원이라는 가격이 나온다면 외투도 많이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을 쉽게 해 볼 수 있다. 다이소 만원 관련 기사를 보면 뷰티업계에서 가격 인상을 요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사실 화장품은 단가가 낮은 제품 중 하나가 어이가 없기는 했다.  내가 이걸 왜 알고 있느냐 하면  전문가로부터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시절 대기업 산하 홈쇼핑에서 인턴 사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겨우 두 달이었고 그 인턴 제도 역시 정부에서 억지로 시켜서 한 거라는 게 너무 뻔하게 보이는 정도였으나 그래도 현직에서 종사하시는 분들의 현장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홈쇼핑은 제조 회사가 아니고 판매만 하는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마진이 가장 많이 남는 제품군 중 하나로 화장품 그리고 의류를 꼽았다. 특히 화장품은 마진이 정말 많이 나와서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유명한 여성 연예인이 과거 홈쇼핑에 나와서 ...

계산이 확실한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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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엄마  아들이 떠나는 마당에 투자한 돈을 언급하는 어머니  엄마도 사람이다. 돌이켜 보면 엄마도 나를 대하는 방식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했다. 어느 시절에는 엄한 엄마였다가 시간이 지나서는 동료같은 느낌으로 그리고 지금은 친구같은 엄마로 변했다. 이게 좋은 변화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사람도 변하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어린 시절에는 왜 몰랐을까. 엄마도 나처럼 변화무쌍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엄마도 사람인데 나는 항상 의지하고자 했고 얼토당토않은 기대를 걸었다. 엄마는 누구보다 연약하고 엄마도 세상 살이가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면 답을 응당 알고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사실 엄마도 다 처음이었다.  특히 부모는 누구나 처음이다.  오은영 박사님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가 그 분처럼 자녀를 다룰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자라는 시절에는 아이 교육을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도 별로 없었다. 그저 부모의 자율에 맡겼다. 나는 그래도 운이 참 좋았다.  엄마라는 사람의 아이일 수 있어서.  내가 십대에서 이십대 초반을 지날 무렵 엄마는 나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투자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중3 시절 우리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거금을 들여 나를 미국 단기 영어 캠프에 보낼 때에도 나를 위한 투자라고 이야기했다. 한달이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영어가 많이 늘기는 했다.  대학생 시절 호주를 갈 때에도 비행기 값과 초기 생활비는 엄마에게 의지했다. 엄마 역시 이를 투자라고 이야기했다. 인천 공항에서 나를 배웅하려고 나온 시점에서도 엄마는 햄버거를 먹으며 나에게 하는 투자라고 이야기했고 내가 생각한 금액이 아니라 그보다는 더 많은 금액이 들어갔다고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물론 그 돈을 다 갚지는 못 했다. 그래도 호주 시드니에서 잠시 쉴 동안 부모님을 초대해 열흘이라는 긴 시간 동안...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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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학교  본인의 분노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 하는 수준 이하의 인간 이번 대전 초등학생 사건을 보면서 나 역시 어느 선생님이 떠올랐다. 나는 나름 무법의 시대에 학교를 다닌 터라 그 당시만 해도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괴롭히는 선생님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인격적으로 문제가 아니 병원을 가봐야 하는 사람들도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참 대단하고 놀라운 시대였다. 지금 이런 선생님들이 있었다면 교사라는 직업을 할 수 조차 없었겠지만 그 시대에는 그런 일이 가능했다. 나의 5학년 담임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눈에 띄게 아이들을 편애하고 실력도 없으면서 우아한 척은 오지게 하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이 사람을 아직까지 기억하는 건 벌을 주는 방식에 있었다. 그 방식이 실로 잔인하고 재수없기로 유명해서 모든 반 아이들이 말은 안 하지만 이 선생님을 정말이지 싫어했는데 나 역시 이 선생님이 초등학교 선생님 중에서 가장 싫었던 터라 반에서 부반장인가를 맡고 있었지만 한 번도 이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나는 이 선생님으로부터 나름의 편애를 받고 있었다. 편애를 받은 이유가 다름 아닌 우리 아버지 덕분이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람이 좋아서 담임 선생님이 요구하는 일에 있어서 시간이 남으면 성심성의껏 도와주는 분이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나는 아버지가 참 멍청한 짓을 했다 싶은데 그래도 아버지 덕분에 나름 지옥같은 시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어서 그 부분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선생님은 교실을 꾸민다고 폐타이어를 구해 달라느니 가을에는 갈대밭에서 갈대를 꺾어 달라느니 하는 황당한 부탁을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사람이 좋아서 그 모든 걸 어디에선가 구해 와서 교실에 배달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유별나게 편애를 받았다. 그래도 돈 봉투를 드린 것도 아닌데 이 정도 편애면 아주 최악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성격 자체가 워...

회사는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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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세상 이야기  회사는 언제든지 나를 버릴 수 있다 내가 회사다운 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인턴부터 따진다면  총 3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인턴으로 일하게 된 대기업 계열사인 L사 홈쇼핑  이후 정직원으로 채용이 되었으나  끝내 입사는 고사했다. 그 당시에도 대기업 입사는 힘들었으나  그래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다음 번에 학업을 마치고 다시 도전해 입사한 기업은 역시나 대기업 계열사인  S사 커뮤니케이션즈  여기는 그래도 1년이 넘게 다니다가  회사가 망조가 들어 미리 나왔다.  마지막으로 내가 몸을 담은 건 10년 가까이 일한  홍콩의 C 항공사.  기간은 상이하지만 그래도 나름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업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다. 대단한 경력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직장인 정도의 커리어라고 할 만하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기 전만 해도 아니 졸업한 이후에도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면서 일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오직 특수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희소한 길이라고 내 자신을 위로했다. 생각해 보면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시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거다. 실제로 지금 불경기인 걸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 달에 백만원의 순수익도 남기지 못 한다는 통계 조사가 있다.  차라리  편의점에서 시간제로 일해도 그보다는 많이 벌 건데 그만큼 사장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승무원 일을 하면서 전세계 여러 나라들을 돌아 보았는데 우리 나라처럼 도심에 상점이 많은 나라가 없다. 우리 나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상점가들이 즐비한데 다른 나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작은 구멍 가게도 찾기 어렵다. 아무리 도시라고 해도 이 정도로 상점가를 밀집시켜 놓은 건 분명 문제가 있다. 그만...

네이버 블로그 저품질의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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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일기  나는 왜 저품질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나  내가 네이버 블로그를 처음 시작한 건 20대 중반 대학생 시절이었다. 완전 초창기부터 시작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블로그 산업 자체의 분위기가 좋았을 때 들어온 건 맞다. 나는 대학생이고 돈도 없었기에 취미 생활로 시작한 경우인데 그 당시에도 협찬이나 광고로 블로그 수익이 월 천만원이 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지금의 물가와 비교해 보면 최소 블로그로만 2-3천만원 이상 벌던 분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지금이야  블로그 후기가 다 돈 받고 입 터는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 당시만 해도 블로그 후기가 진정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고 그로 인해 기업들과 블로거들의 협업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상태였고 당연히 돈을 많이 버는 소수의 블로거들도 많이 나왔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블로그로 월세와 용돈 정도는 벌었다.  그렇게  블로그를 가볍게 하면서  취업을 하고 이직을 하면서도 네이버 블로그는 꾸준히 유지해 왔으나 코로나 직격탄을 맞이하여 무급 휴가로 회사를 쉬던 중 네이버는 갑자기 인플루언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는 걸 들었다. 유튜브로 유명 블로거들이 대거 이탈하자 결국 크리에이터를 붙잡아 두는 건 돈 뿐이라는 걸 네이버가 늦게나마 깨닫고 돈을 뿌리기 시작한 건데 공표는 2018년에 했지만 본격적으로 돈을 뿌린 건 2020년이라서 네이버 답게 어이없을 정도로 늦기는 했다. 그래도  나는 이 여세를 이어 받아 2022년도부터 대기업 월급 이상의 돈을 블로그를 통해 벌어 들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20만원 정도로 시작해서 다음 달에는 30만원 이런 식으로 늘어 가다가 일이년이 지나자 한 달에 수백만원에서 천만원이 넘는 수익을 기록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기쁜 것도 잠시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진다.  갑자기 내가 운영하는 네이버 블로그가 저품질의...

교도관으로 일했던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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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쫀한 엄마 이야기  여성 교도소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어머니  나는 사춘기로 방황하던 시절 오히려 엄마와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누었다. 조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을 하나의 인격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나를 보호해주는 지지자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극심한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면서 엄마도 결국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어린 시절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질 않았기에 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래 엄마도 사람이다.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 아니 무시하고 있었던 거였다. 나는 사춘기도 있었겠지만 당시 친 형의 죽음과 다니던 학교에서의 부적응 문제로 마음 고생을 하고 있었다. 하루 아침에 형은 교통 사고로 주검이 되어 돌아 왔고, 다니던 학교에서는 학교의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장까지 나서서 나를 짓밟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사춘기를 겪은 게 아니라 그 당시 나의 주변 환경이 극악무도한 수준이었는데 어린 시절에는 이걸 그저 사춘기로 치부하고 넘겨야 할 통과 의례 정도로 생각하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웠던 터라 그렇게 착각한 게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 엄마와 누구보다 대화를 많이 했고 중학교 시절 학교를 보름이나 가지 않으면서 할 게 딱히 없어서 엄마와 산책을 나가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서 엄마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되었는데 엄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교도관으로 일했던 경험을 풀어 주었다. 사실  엄마가 교도관으로 일했다는 것도 그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엄마가 한 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목사의 아내로 임하면서 교도관으로 일했다는 걸 교인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나한테 이야기한 건 내가 너무 심하게 방황을 하다 보니 ...

아이 머리를 각목으로 때리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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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학교 이야기  만으로 7살도 안 된 아이들의 머리를 단단한 각목으로 때리는 남자 선생님,  실화입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떠올리기 싫지만 내가 겪은 일이다.  심지어 그 때가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인 시절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남자 선생님은 1년이 지나고 나서 학부형들의 적극적인 반발로 인해 다른 초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지만 이 정도로 폭력적인 선생님을 자르지는 못 하고 겨우 조치를 취한 게 전근이라니 그 인간을 또 만나게 될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형사 처벌을 받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절대로 잘리지 않았다. 심지어 학생과 문란한 관계를 가진 걸 들킨다고 해도 당시에는 소송을 거는 게 일반적인 일이 아니어서 전근을 가서 또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할 수 있는 게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어이없고 기가 막히지만  시대가 그러했다. 지금처럼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그런 것도 일절 없었다. 게다가 사회 문화 자체가 선생님은 하늘 그리고 학생은 선생님 말씀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가 존재하기도 했었다. 지금의 학교 문화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그래도  각목으로 아이의 머리를 때리는 건 심하긴 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선생님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많이 택했다. 이건 들은 이야기이긴 한데 한 때 우리 나라에서 베이비 붐으로 아이를 많이 낳을 시절 오전반 오후반이 있을 정도로 학교 에서는 선생님의 수요가 부족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도 나이가 50이 넘은 나이가 조금 있는 분이셨는데 본인은 겨우 3개월의 교육 과정을 받고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고 자랑처럼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너무 부족하다 보니 그런 식으로 교원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교육을 시켜야 하고 선생님은 부족하다 보니 말 그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