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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이 확실한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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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엄마  아들이 떠나는 마당에 투자한 돈을 언급하는 어머니  엄마도 사람이다. 돌이켜 보면 엄마도 나를 대하는 방식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했다. 어느 시절에는 엄한 엄마였다가 시간이 지나서는 동료같은 느낌으로 그리고 지금은 친구같은 엄마로 변했다. 이게 좋은 변화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사람도 변하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어린 시절에는 왜 몰랐을까. 엄마도 나처럼 변화무쌍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엄마도 사람인데 나는 항상 의지하고자 했고 얼토당토않은 기대를 걸었다. 엄마는 누구보다 연약하고 엄마도 세상 살이가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면 답을 응당 알고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사실 엄마도 다 처음이었다.  특히 부모는 누구나 처음이다.  오은영 박사님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가 그 분처럼 자녀를 다룰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자라는 시절에는 아이 교육을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도 별로 없었다. 그저 부모의 자율에 맡겼다. 나는 그래도 운이 참 좋았다.  엄마라는 사람의 아이일 수 있어서.  내가 십대에서 이십대 초반을 지날 무렵 엄마는 나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투자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중3 시절 우리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거금을 들여 나를 미국 단기 영어 캠프에 보낼 때에도 나를 위한 투자라고 이야기했다. 한달이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영어가 많이 늘기는 했다.  대학생 시절 호주를 갈 때에도 비행기 값과 초기 생활비는 엄마에게 의지했다. 엄마 역시 이를 투자라고 이야기했다. 인천 공항에서 나를 배웅하려고 나온 시점에서도 엄마는 햄버거를 먹으며 나에게 하는 투자라고 이야기했고 내가 생각한 금액이 아니라 그보다는 더 많은 금액이 들어갔다고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물론 그 돈을 다 갚지는 못 했다. 그래도 호주 시드니에서 잠시 쉴 동안 부모님을 초대해 열흘이라는 긴 시간 동안...

회사는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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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세상 이야기  회사는 언제든지 나를 버릴 수 있다 내가 회사다운 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인턴부터 따진다면  총 3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인턴으로 일하게 된 대기업 계열사인 L사 홈쇼핑  이후 정직원으로 채용이 되었으나  끝내 입사는 고사했다. 그 당시에도 대기업 입사는 힘들었으나  그래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다음 번에 학업을 마치고 다시 도전해 입사한 기업은 역시나 대기업 계열사인  S사 커뮤니케이션즈  여기는 그래도 1년이 넘게 다니다가  회사가 망조가 들어 미리 나왔다.  마지막으로 내가 몸을 담은 건 10년 가까이 일한  홍콩의 C 항공사.  기간은 상이하지만 그래도 나름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업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다. 대단한 경력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직장인 정도의 커리어라고 할 만하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기 전만 해도 아니 졸업한 이후에도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면서 일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오직 특수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희소한 길이라고 내 자신을 위로했다. 생각해 보면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시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거다. 실제로 지금 불경기인 걸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한 달에 백만원의 순수익도 남기지 못 한다는 통계 조사가 있다.  차라리  편의점에서 시간제로 일해도 그보다는 많이 벌 건데 그만큼 사장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승무원 일을 하면서 전세계 여러 나라들을 돌아 보았는데 우리 나라처럼 도심에 상점이 많은 나라가 없다. 우리 나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상점가들이 즐비한데 다른 나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작은 구멍 가게도 찾기 어렵다. 아무리 도시라고 해도 이 정도로 상점가를 밀집시켜 놓은 건 분명 문제가 있다. 그만...

아이 머리를 각목으로 때리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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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학교 이야기  만으로 7살도 안 된 아이들의 머리를 단단한 각목으로 때리는 남자 선생님,  실화입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떠올리기 싫지만 내가 겪은 일이다.  심지어 그 때가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인 시절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남자 선생님은 1년이 지나고 나서 학부형들의 적극적인 반발로 인해 다른 초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지만 이 정도로 폭력적인 선생님을 자르지는 못 하고 겨우 조치를 취한 게 전근이라니 그 인간을 또 만나게 될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형사 처벌을 받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절대로 잘리지 않았다. 심지어 학생과 문란한 관계를 가진 걸 들킨다고 해도 당시에는 소송을 거는 게 일반적인 일이 아니어서 전근을 가서 또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할 수 있는 게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어이없고 기가 막히지만  시대가 그러했다. 지금처럼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그런 것도 일절 없었다. 게다가 사회 문화 자체가 선생님은 하늘 그리고 학생은 선생님 말씀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가 존재하기도 했었다. 지금의 학교 문화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그래도  각목으로 아이의 머리를 때리는 건 심하긴 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선생님을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많이 택했다. 이건 들은 이야기이긴 한데 한 때 우리 나라에서 베이비 붐으로 아이를 많이 낳을 시절 오전반 오후반이 있을 정도로 학교 에서는 선생님의 수요가 부족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도 나이가 50이 넘은 나이가 조금 있는 분이셨는데 본인은 겨우 3개월의 교육 과정을 받고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고 자랑처럼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너무 부족하다 보니 그런 식으로 교원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교육을 시켜야 하고 선생님은 부족하다 보니 말 그대로 ...

인생 최초의 도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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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요람기  나는 왜 동전을 훔치게 되었나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처음이자 마지막 도둑질이기에 기억에는 나름 생생한데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벌인 건지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잘 이해가 안 간다. 뭐에 씌었던 걸까. 누가 나를 종용한 걸까. 아니면 내 안에 그런 기질이 원래부터 있었던 걸까. 왜 그랬던 걸까. 그 당시로 돌아가서 나에게 묻고 싶다. 왜 훔친 거니?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바야흐로  벌써 오래전 일이다.  아마도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시절이라고 기억이 나는데 숙제를 제대로 했다거나 공부를 한 기억이 없어서 아마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일이었을 거다. 그 날은 아마도 휴일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았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내가 다니던 유치원은 초등학교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형과 함께 등교를 했는데 그 날은 등교를 한 기억이 없다.  어른들은 일을 보러 낮에 잠깐 나가시고 나는 그날도 마을의 친구들과 마을 어귀에서 놀게 되었다. 그 당시 하루 일과는 뭐 그런 식이었다. 워낙 시골이었던 터라 학원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딱히 놀 만한거리들이 많은 시절도 아니었다.  그저 모여서 마을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 직전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노는 게 일상이었다. 지금의 어린 친구들은 학원과 집을 오간다고 하지만 시골에서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고 그 당시에는 다 그렇게 놀았다. 그 날도 아무 생각없이 친구들과 놀다가 갑자기 누군가 말을 꺼낸 듯하다. 군것질 거리를 먹고 싶다고 말이다. 지금처럼 온라인 쇼핑은 꿈도 못 꾸고 마트가 흔한 시절도 아니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그 흔한 슈퍼도 없어서 가게에 가려면 읍내로 나가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소규모로 운영하는 그야말로 과자 몇 개와 소주나 막걸리 정도를 파는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구멍 가게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가게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아무도 돈이 없었다. 그때 나는 떠올렸다. 부모님께...

같은 반 지적 장애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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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학교 이야기  외모와 기럭지 모두 완벽한데 지능이 낮았던 그 친구  나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학교를 다닌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지금의 학교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라떼를 말해 보자면 그야말로 정글이었다 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지금도 우리 나라 교육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내가 판단 내릴 문제는 아닌데 그래도 안정화가 되었다는 거 자체가 반갑다.  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시스템 자체가 없었기에 변화를 그대로 맞이해야 했고 그런 연유로 독특한 경험을 할 일도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지적 장애인과 같은 반에서 무려 2년 가까이 같이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나는 시골의 중학교를 다녔기에 그 지역에는 당연하게도 특수 학교 이런 게 없었다. 도시만 해도 지적 장애나 자폐성 장애가 심한 경우 특수 학교를 가는 게 당연하지만 시골에는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당시는 지적 장애는 있어도 자폐성 장애는 주변에 별로 없었는데 그 친구를 생각해 보면 확실히 지적 장애가 맞기는 한 거 같다. 이 두 개를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사회성이라는데 그 아이는 확실히 사회성은 있었고 그로 인해 아이들과 생각보다는 잘 어울려 놀긴 했다. 그걸  놀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긴 하지만 말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 친구의 이름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다른 어떠한 친구보다 잔상에 오래 남는다. 그만큼 독특한 친구였고 초등학교 시절에도 본 적이 없는 친구여서 그러했던 듯하다. 오히려 초등학교 시절에는 특수 학교는 없어도 학교 안에 특수 학급이 있어서 그런 아이들을 따로 모아서 특별 수업을 한 터라 학교에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중학교는 무슨 연유...

흙을 맛있게 먹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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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요람기 그 때에는 흙이 그렇게 맛있었다  나는 흙을 많이 먹었다 고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기억이 생생하게 나기도 한다.  내가 흙을 먹던 그 기억 말이다.  심지어 맛있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맛이 없었다면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흙을 먹지는 않았을 테니 납득이 가긴 한다. 정확히 무슨 맛이었는지도 대충 기억이 나는 게 신기할 정도로 흙을 먹은 기억들이 생생하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 흙이냐 먹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주로 먹은 흙은 흙먼지같은 느낌의 고운 흙이었다. 진흙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초등학교 저학년 혹은 유치원 시절 봄이었다. 마른 흙으로 인해서 바람만 불어도 흙먼지가 사방에서 날아다니던 건조한 날씨.  지금은  학교마다 트랙을 깔고 잔디를 깔면서 학교 운동장에서 흙먼지가 날리는 일이 과거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건조한 날 운동장은 흙먼지 그 자체였고 비가 내리면 진흙탕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비가 온 다음 날에는 운동장에서 축구라도 하고 들어오면 운동화가 난리도 아니었다. 흙을 먹었지만 진흙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먼지같은 흙먼지는 손으로 퍼서 먹었었다. 손으로 살살 골라서 고운 흙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혀로 핥으면서 맛을 느끼고 음미했다. 말 그대로 흙의 맛을 음미했다고 보는 게 맞다. 위생을 생각하자면 더럽고 지저분한 게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맛이 있었다.  신기한 건 학교 안에서는 분명 누군가의 지도와 감시 아래 있었을 텐데 흙을 먹는다고 선생님에게 혼난 기억은 한 번도 없다. 단지  내가 흙을 먹는 모습을 보고 기겁한 엄마에게 많이 혼났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혼이 나면 더 몰래 한다고 그 뒤부터는 혼자서 몰래 흙을 먹었는데 어느 순간 나 역시 더 이상 흙을 먹지는 않게 되었고 그 기억을 아예...

화가는 정말 가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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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쫀쫀한 엄마 이야기  어린 시절에 듣게 된 엄마의 진심  나는 엄마와 사이가 굉장히 좋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에도 아니 사춘기 이후부터는 압도적으로 엄마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안 계신 건 아니다. 아버지도 멀쩡히 살아 계시지만 무언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부터는 아버지와 대화 자체를 잘 안 하게 되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왜 아버지와 대화를 하기 힘든지 고민을 하고 그로 인해 심적으로는 힘들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나와 안 맞는 사람과 무리하게 이어지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참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시간과 노력 자체가 굉장히 피곤한 일이며 의미가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애초에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거다.  그래도  나에게는 엄마가 있다. 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마음 터 놓을 수 있는 건 굉장한 복이다.  두 분 다 그렇다면 전생에 분명 나라를 구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엄마도 어린 시절부터 아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나는 성격적으로 엄마와 거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나이 들면서 그런 걸 더 강하게 느끼는 편이다. 외모는 아버지와 닮았지만 가치관이나 성격은 엄마와 비슷해서 우리 둘은 자주 싸우고 또 그만큼 서로 의지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엄마와의 대화를 꽤나 자세하게 기억한다.  순간 기억력은 좋으나 오래된 기억은 그다지 안 좋은 편임에도 엄마가 해준 이야기는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고 내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서 선택을 할 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아니 사실상 엄마가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국 대회가 아닌 도 대회...